그날의 너를 보며

2021. 1. 28. 23:50

그날의 너는 그저 한송이 꽃마냥 웃어보였다. 그 발갛게 물든 네 뺨을 조심스래 건드리니 내 심장은 터질 것마냥 두근거렸고, 너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그런 내 손을 잡아보였더랬다. 그 순간에 나는 네게 정말로 물들어버린 것 같았다. 색이 없던 날, 네가 너의 색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우린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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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언제였을까. 아마 입학식 날이었겠지. 그 때의 너는 날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으니. 그러나 난 나를 스쳐 지나가는 네 곁에서 나던 말간 섬유유연제 향을 맡았고, 그 향에 이끌려 너를 돌아봤다. 너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저 친구들과 웃으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역시나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돌려 내 갈길을 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인사 한마디 없이 끝이 나는 줄 았았다. 그렇게 아무런 접점도 없이 한 해를 보내고 2학년이 된 우리들은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

 

한 반의 동급생으로.

 

 

여느때와 같이 일찌감치 등교해 맨 뒤의 창가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을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들리는 낡은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나는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고, 보였던건 옅은 파스텔톤 분홍머리의 너였다. 점점 발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오자 훅 끼쳐오는 그때의 섬유유연제 향에 아, 그 애가 너구나. 하는 생각이 확 스쳐지나갔다. 내 근처로 다가온 너는 그저 말갛게 웃어보이며 안녕? 이라며 내게 인사를 건내었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하고많던 그 자리중에 하필이면 내 옆자리에. 그리고 너는 그저 교과서를 꺼내어 정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나는 계속 힐끔거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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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많은 나날들이 지나 초여름의 날씨에 제법 가까워졌을 때 즈음 우리는 둘도없는 사이가 되었다. 점심도, 공부도, 운동도 같이 하는 사이. 그런 우리들을 보며 주변 친구들은 사귀냐며 농담을 건내고는 했다. 뭐어... 우리가 너무 붙어다니기는 했었지. 그때마다 난 아니라며 친구들에게 웃으며 대답하곤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누군가 그 질문을 했을 때, 너는 귓가가 어쩐지 붉어진 것 같았었다. 내 착각이었겠지만. 난 네가 대답하기를 기다렸으나 넌 끝끝내 대답하지 못했고, 결국은 내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모습에 너는 조금 서운한 듯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역시 내 착각이었겠지, 라며 넘기고는 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여전히 붙어다녔다. 함께 등교하고 밥을 먹고 공부하고 하교하고. 그것이 우리의 학교생활이었다. 난 언제나 일찍 등교했고, 너 역시 일찍 등교하는 편이었으나 내 시간에는 따라오기 힘들었던지 항상 함께 등교하고 나면 너는 조례시간이 오기 전까지 자습은 커녕 책상에 엎드려 잠에 빠져들기 일수였다. 그런 너를 바라보며 나 역시 자습은 내팽겨치고선 엎드려 너를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렇게 난 네게 서서히 물들어갔다.

 

어느 여름날, 네가 곤히 잠들줄로만 알았던 난 헝클어진 네 분홍색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정리해주던 참이었다. 그런데 네가 눈을 슬그머니 뜨고서는 내 손을 깍지끼며 잡아왔다. 슬쩍 손을 깍지끼고선 붉어진 귓가 채 숨기지 못하고 여상스레 웃어보이던 너는 내게 뭐하고 있었냐며 물어왔고, 그런 네 모습에 난 그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왜 그때 대답하지 못했을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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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비추어 보면 파란색으로 빛이나는 내 검은 머리, 그리고 한송이의 복사꽃과도 같던 네 분홍머리. 우리 둘의 조합은 어딜 가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강아지같이 순하게 잘생긴 외모도 덤으로. 그렇게 어딜 가나 주목을 받던 우리는 시선 하나 의식하지 않고 같이 다녔다. 그러나 이젠 네가 슬슬 의식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네가 내 손등을 건드리는 것도, 나를 보며 웃는 것도. 전부 의식되며 내 안이 울렁거렸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하고 어쩐지 이런 마음을 품은게 미안했다. 그렇게 나는 내 마음을 정의내리지 못한 채 네 옆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정의내리길 포기한지 몇일이 지나지 않아 네가 날 보며 복사꽃마냥 어여삐 웃어보였을 때, 나는 확신했다. 아, 나는 널 좋아하는구나. 사랑하는구나. 나는 네게 어느순간부터 물들어가고 있었구나. 네가 무얼 생각하냐며 내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을 때 나는 귓가가 뜨겨웠다. 붉어져 어쩔줄을 몰라했다. 제발 네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며 그저 웃어보였다. 이젠, 친구들이 장난스레 사귀냐고 물어보아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네 눈치를 보기만 했다. 나는 내 감정이 좋았고, 그와 동시에 두려웠다.

 

하교하기 전, 너는 수돗가에서 물이라도 적셨는지 날이 더웠는지 젖어있었다. 네가 그저 웃어보이며 내게로 다가와 혹시 나 땀냄새 나? 라고 물어보았을 때 훅 풍겼던 냄새는 찐덕한 땀냄새도 아닌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 뿐이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미칠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내리 누르기에 바빴다. 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해버린 나는 환히 웃어보이는 너에 그저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렸는지 네게 다가가 그저 입술을 겹칠 뿐이었다. 눈을 뜨고 떨어지자 보이는건 당황한 네 모습. 나는 네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그저 붉어진 귀만 숨겨보여 애쓰며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등교하지 않았다. 처음 2학년에 올라왔던 그날처럼 난 홀로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첫날, 그때와 같은 시간에 네가 들어왔다. 시선을 마주친 우리는 어색하고 뻣뻣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너는 역시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조례를 하고 수업이 시작되고. 우리는 필기 도중에 몇번이고 손을 스쳤고, 그때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기에만 바빴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쉬는시간, 점심시간에 친구들은 어쩐지 조금 어색하고 서먹해보이는 우리를 보고서는 너희 이상해, 라며 말을 했고, 우리는 동시에 흠칫 놀라며 어디가 이상하냐고, 완전 멀쩡하지 않냐고 되려 따져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끝자락에 나는 네게 작은 쪽지를 하나 건네었다. 혹시 이따가 하교할 때 잠깐 남을 수 있냐는 내용의 쪽지를. 어제 일을 제대로 해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나는 쪽지를 발견하고 귓가를 붉히며 나를 흘끗 바라보는 너를 보며 그저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귀엽다. 이대로 확.. 키스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훅 스쳐지나가자 나는 새빨간 토마토가 되어 그저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미움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만이 되려 머릿속을 차지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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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과 종례가 다 끝나고 교실엔 우리 둘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저 손가락만 꼼질대며 네 눈치를 보기만 했다. 어떠한 말을 무어라 꺼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다가와 내 입술에 네 입술을 겹치는 것이 아닌가. 그대로 우리는 입술을 맞대고선 혀를 섞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맞댔던 입술보다 더 달았고 달았다. 달아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나는 숨이 막혀 너를 조심스래 밀어냈다. 은사는 주욱 늘어져 끊어졌고,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 그저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귓가에 울려오는 네 목소리.

 

" 너... 나 좋아해? "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대 맞은 것만 같았다. 고개를 황급히 들어 너를 바라다 보니 너 역시 나만큼이나 발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그저 두렵고 설레는 떨림을 안고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네가 나를 바라보며 해말갛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그리고 나를 꽈악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나는 여상스레 웃어보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 원래부터 저해져 있던 대답을 꺼내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의 내 감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다.

 

" 응, 좋아해 "

 

그리고 난 네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네 입술을 물어삼켰다. 창문을 열어두어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던 흰 커튼이 우리의 모습을 감추어 주었고, 우리는 누가 오는지도 안오는지도 모르는 채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우리는 서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By. JANG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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