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고 무해하던

2021. 7. 9. 22:44

그는 언제나 밝은 모습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난 반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그를 바라보며 두근거리던 내 마음을, 미친듯이 뛰어대던.. 그래서 어쩌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내 심장을 난 주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난 그 마음을, 감정을, 내 전부를 감춰내야만 했습니다. 그대와 난 어울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대는 나같은 것과 어울면 안될만큼 귀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난 이 마음을 꾹꾹 내리 눌렀습니다. 이 뜨거운 열병에 잠식되어 천천히 죽어가더라도 처절하게 꼭꼭 숨겼습니다. 그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대는 언제까지나 어렸던 나를, 미치도록 비참하게 잠식되어 죽어가던 나를 구해준 구원자로 남아야 하니까요. 내 마음이 동한 상대여선 아니되었으니까요. 그대에겐 나같은 사람보다는 더 환하고 밝은.. 그래요, 밝은 하늘같은 사람이 더 어울렸으니까요. 태양에겐 밝은 하늘이 어울리니까요.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르네요. 그때의 난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어둠속에 정신을 잡아먹히고 우울에 내 온 마음을 내주었던 나날들을 보내던 시기였지요. 그때 그 당시의 삶이 내 인생 중 가장 암흑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삶은 언제나 어두웠지만 그때야말로 정말 너무나도 힘들고 어두워서, 그 어둠에 더 이상은 잠식되고 싶지 않아서 콱 죽어버릴까 고민도 많이 하던 시기였습니다. 여차하면 저 하늘에 몸을 던지려고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독여가며, 아니 자책하고 자해해가며 겨우겨우 살아가던 나에게 그대는 찾아왔습니다. 잘나가는 이 도시에서도 낡은, 싼값에 사고팔리는 이런 동네의 한 빌라에서 말이죠. 그곳은 정말로 낡고 지친 곳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여러번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들, 아스팔트는 금이 가다 못해 심지어는 깨져있었고 제대로 된 상가 하나 없었을 뿐더러 가로등은 어둔 밤에도 제대로 불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난, 그리도 밝던 당신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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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동네, 낡은 건물. 층간소음이 만연하고 어둠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햇살같던 당신은 나의 옆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나는 처음엔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습니다. 이곳에 왜 이사를 했는지, 왜 하필이면 이 동네에 이 건물인지,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 옆집인지. 나는 처음엔 그대를 그리도 원망했습니다. 괜한 이웃이 생겨 귀찮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 다음엔 무관심이었습니다. 어차피 그대도 나와 같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안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밤에 너무도 울어대서 나의 잠을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그대는 그 이곳의 그 누구보다 밝고 희망찬 사람이었습니다. 어둠속의 한줄기 빛자락 같았지요. 당신은 이사온 다음날 내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떡을 돌리겠다면서요. 이곳의 그 누구도 이사떡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대는 민망하다는 듯이 그저 베시시 웃어보였습니다. 손에 들고있던 시루떡 그릇을 내 손에 안겨주며 말갛게 인사하고는 떠났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지요. 그렇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갔으나 누구보다 의욕없이 살아가며 어두웠고 비관적이었던 나에게 한줄기 빛이 찾아와 두드렸던 것입니다.

 

어질러진 식탁 위에 대충 시루떡 그릇을 올려놓고는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왜 이것을 주었을까, 정말 인사일까? 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생각을 해보았자 나만 더 귀찮아 질 뿐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아직 말랑한 떡을 두고 시선을 물리기에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였기에 조심스레 떼어내어 입에 넣었습니다. 간만에 받아보는 누군가의 호의인지 모를 것. 맛있었습니다. 그냥저냥 떡집에서 파는 시루떡 맛이었습니다만, 내게는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었습니다. 이 날이 내가 그대에게 물들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한입 한입 먹다보니 어느새 그릇은 바닥을 보였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귀찮아하고 무신경하게 굴었던 것 치고는 꽤나 빠른 속도였습니다. 무안했지요. 민망했습니다. 몰려들어오는 민망함에 머리만 북북 긁어댔지요. 이대로 어질러진 그릇을 그냥 돌려주기에는 아직 양심이 남았는지 가슴 언저리가 쿡쿡 쑤셔와 온수도 잘 나오지 않는 개수대에서 깨끗이 설거지를 하고는 옆집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한 채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래 낡아빠진 현관문을 두드렸습니다. 벨은 누르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빌라의 초인종이란건 이미 망가져 작동하지 않았으니까요. 몇분동안 가만 서있자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탕탕 소리. 꽤나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문을 벌컥 열고나온 당신의 모습에 밀려오던 짜증마저 가라앉았습니다. 어찌된 일 일까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받은 떡 잘 먹었다며 감사인사를 하고는 깨끗하게 닦아낸 뽀얀 그릇과 함께 냉장고에서 고심하다 집어들어온 싸구려 음료수를 하나 건내었습니다. 변변찮지만 감사인사이니 받아달라는 말과 함께요. 그러자 당신은 환히 미소지었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음료수는 잘 마시겠다며 감사하다고. 나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대가 내 옆집으로 이사를 온건 날 구원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망상을 말입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이 망상을 헤집어 쫓아내고는 대충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인 채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급히 열은 낡아빠진 문은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 천천히도 아니고 순식간에 쾅, 하고 닫혔습니다. 그 커다란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런 복도를 뒤로 한 채 안에서 숨만 천천히 내쉬고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말갛게 웃어주던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무너질 것만 같은 빌라에서 처음이 아니라 내 삶에서의 처음이었습니다. 모두들 나를 괄시하고 무시하기만 했기 때문이었죠. 아주 어렸을 적에도, 어린 학생이던 시절에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지금에도. 무시하며 괄시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나를 보며 웃어주던 이들은 없었습니다. 아니,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웃음과 동정의 미소였던 것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 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대의 미소가 내 머릿속을 멤돌며 이리저리 유영하고 다녔기 때문이었죠. 애써 흔적들을 지워보고 잠을 청하려 해보아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얼마 자지 못하고 일어나 여전히 흐린 아침을 맞고서는 대충 씻고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해보려고 하던 노력이었을까요. 어차피 학교도, 회사도 다니지 않는 나로써는 할게 없었지요. 아르바이트라도 구해보려 했지만 도시살이는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싸구려 핸드폰에 깔려있는 알바자리 앱들을 뒤적이며 이리저리 겨우겨우 면접보러 다녀도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죠. 그냥 이렇게 대충 살다가 죽어도 누가 날 발견하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 그냥 기계적으로 비좁은 방만 치웠습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때우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굴까, 옆집일까 생각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순식간에 차오른 기대감을 안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내 기대감은 딱 들어맞았습니다. 옆집이었던 것입니다. 방금까지 방을 치우다가 나와서 그런지 덥고 습한 날에 땀이 흐르지 않을 리가 없었지요. 나는 그런 과거의 나를 때리며 애써 미소지어보였습니다. 그런 날 보고서 그대는 빙그래 미소지어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뭇내 마음에 걸려왔던 난 그저 애꿎은 시선만 피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 시야에 그대는 끊임없이 들어오려 했고, 나는 결국 그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었던가요. 아, 마을을 둘러보고 싶다고, 길을 안내해달라 했었던가요.. 나는 그대의 말에 고민을, 망상을 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을 그대의 이 말에 응하고 건네어진 손을 잡으면, 그러면 내 우울한 삶에도 한줄기 희망이란게 생길까 하고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한심하게도 당신을 나의 위안으로 삼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면 안되는 것 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에게 내밀어진 이 사과는 너무도 붉고 탐스러워 기어이 한입을 베어물게 만들었습니다. 그대가 내민 하얗고 가는 손을 마주잡고서는 그댈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먼지날리던 낡은 동네를 돌았습니다. 이곳은 무엇이고 저곳은 무엇이다 여상히도 설명하며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면 그대는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어주었지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바퀴 돌고 그대는 조그마한, 다 스러져가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나 역시 걸음을 멈추었지요. 그대는 식당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는 그대를 따라갔고 말입니다. 한번도 오지 않았던 이 가게는 젊은 아주머니께서 운영하시는 분식집이었습니다. 어린아이라고는 없을텐데 왜 분식집이었을까요. 여하튼 그대는 조금의 분식을 시키고는 고운 목소리로 조잘조잘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먹는 것도 잊고 그대만을 바라보며 웃었지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저녁날, 나는 씻고 나와 오래된 침대에 걸터앉고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대가 낮에 한 말이 계속 속에서 멤돌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요즘 힘드냐고 물어본 그대의 말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남에게 내색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그런 나를 본 그대는 그저 해맑게 웃어보이며 말했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언젠가 다 지나갈 것이고 이겨낼 수 있다고. 밤이 지나고 동이 트면 아침이 밝아오듯이 삶도 마찬가지라고. 그 말에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위로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위안 말고, 누군가에게서 처음 들어본 위로. 나는... 나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날 보며 그대는 계속 말했습니다. 아득바득 이를 갈며 어떻게든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살아남으면 그것만으로도 값진 성공이라고.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니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치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갰다고. 나는 기어이 입을 다물고야 말았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못했습니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난 이게 무슨 기분일까 생각했습니다. 타인에게 위로를 받으면 짜증부터 나기 일수였는데, 왜 그대가 하는 말들은 짜증나지 않았을까요. 왜 마음을 쿡쿡 찔러왔던 것일까요. 내 심장은 이미 다쳤고,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곪고 썩어 문드러져 이제는 감각조차도 없는데 왜 그 심장을 감싸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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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언젠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외로이 죽으려 했습니다. 날 챙겨주는, 하다못해 삿된 위로의 말 한마디마저 건네주는 이 없는 이 세상에서 홀로 쓸쓸하게 사라지려 했습니다. 세상의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울 하나 빠져나갔다고 해서 멀쩡히 돌아가던 것이 갑자기 멈출리는 없으니까요. 되려 더 잘 돌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그대의 말 한마디, 두마디에 나의 삶이, 내 시야가 바뀌었습니다. 그대가 있는 이 세상에서 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합니다. 희고 무해하던 모습으로 한마디 위로의 말을 조심스레 뱉어내던 그대를 감히 마음에 품고서 그리 살아보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곁에 없는 그대를 내 가슴에 묻고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낡은 동네가 아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당신을 추억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이 더럽고 썩어빠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값진 삶을 선물로 가지고 그대의 곁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대가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나에게 넘겨준 그 희망을 또다른 나에게도 넘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물론 그대의 성정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만, 또 다른 나같은 이를 구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염치없지만 부탁합니다 나의 희고 무해하던 작고, 소중한 그대.

 

 

By. JANG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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